왕가위 영화는 어떤 순서로 보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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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영화는 어떤 순서로 보면 좋을까요?

왕가위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같은 장면에서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홍콩의 네온과 음악이 기억에 남았는데, 두 번째에는 인물들이 말을 멈추는 순간이 더 오래 남더군요. 개봉 순서대로 모두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분위기의 영화를 보고 싶은지에 따라 첫 작품을 고르면 훨씬 편합니다.

첫 편은 가볍게 시작할까, 깊게 빠져들까

처음 만나는 왕가위 영화라면 1994년작 <중경삼림>을 권하고 싶습니다. 실연한 두 경찰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한 사람의 사연이 끝난 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이 옮겨가는 구성이라 따라가기 어렵지 않습니다. 파인애플 통조림과 반복해서 들리는 노래처럼 사소한 물건과 소리가 마음의 상태를 대신 말해줍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거리와 혼자 남은 방의 온도 차이도 선명합니다.

차분한 이야기가 더 끌린다면 2000년작 <화양연화>가 좋은 출발점입니다. 같은 건물에 사는 두 사람이 배우자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가까워집니다. 다만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좁은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습, 함께 걷다가 멈추는 시간에 마음이 쌓입니다. 줄거리의 속도보다 장면의 여운을 즐기는 날에 잘 맞습니다.

비슷해 보여도 작품마다 온도가 다릅니다

<중경삼림>이 낮과 밤을 오가며 가볍게 흔들린다면, 1995년작 <타락천사>는 홍콩의 밤을 훨씬 거칠고 낯설게 보여줍니다. 애초 <중경삼림>의 한 부분으로 구상됐다가 별도 작품이 된 영화입니다. 두 편을 이어 보면 비슷한 도시와 외로움을 다루면서도 화면의 거리감이 얼마나 다른지 느껴집니다. 광각으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과 불안하게 번지는 불빛이 인상적입니다.

1997년작 <해피 투게더>는 무대를 아르헨티나로 옮깁니다. 함께 떠난 연인이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사이, 관계를 되돌리고 싶은 마음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부딪힙니다. 화려한 여행 영화나 편안한 연애담을 기대하면 꽤 쓰라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감정은 오래 남습니다.

1988년 데뷔작 <열혈남아>는 범죄 영화의 틀 안에서 인물 사이의 의리와 사랑을 그립니다. 다른 작품보다 장르의 움직임이 뚜렷해 왕가위 영화의 느린 호흡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뜻밖의 입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1990년작 <아비정전>은 인물의 빈자리와 지나간 시간을 오래 바라봅니다. 같은 감독의 작품이어도 기대할 리듬은 다릅니다.

<2046>은 언제 보는 편이 좋을까요

<2046>은 2004년 작품으로, <화양연화>의 주인공 차우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래서 <화양연화>를 먼저 보는 편이 인물의 말과 행동에 남은 흔적을 읽기 좋습니다. 그렇다고 두 영화가 사건을 빠짐없이 잇는 연속극은 아닙니다. <2046>은 소설 속 미래의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가 오가며, 잊었다고 생각한 마음이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보여줍니다.

<아비정전>도 함께 떠올려볼 만합니다. 영국영화협회와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은 이 세 작품을 느슨하게 이어지는 흐름으로 소개합니다. 다만 <아비정전>의 모든 인물을 기억해야 <화양연화>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닙니다. 처음에는 <화양연화>를 보고, 마음에 남았다면 <아비정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뒤 <2046>으로 넘어가도 자연스럽습니다.

관람 전에는 이야기보다 화면과 음악을 기억해두면 좋습니다

왕가위 영화에서는 같은 노래가 다시 나올 때 장면의 뜻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중경삼림>에서는 반복되는 팝송이 일상에 들러붙고, <화양연화>에서는 음악이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을 붙잡는 듯 들립니다. 처음부터 상징을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노래가 시작될 때 인물 사이의 거리가 달라지는지만 봐도 재미있습니다.

복원판을 볼 예정이라면 익숙한 스틸 사진과 색감이나 화면 구도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은 왕가위가 참여한 복원 작업에서 일부 작품의 색과 화면비를 조정했다고 설명합니다. 온라인에서 본 장면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영화를 틀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판본인지 확인하면 비교하는 재미가 생깁니다.

제게는 <중경삼림>으로 도시의 리듬을 익히고 <화양연화>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는 순서가 가장 편했습니다. 그다음 작품은 취향이 정해줍니다. 더 어두운 밤이 궁금하면 <타락천사>, 관계의 아픔이 남았다면 <해피 투게더>, 지나간 마음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면 <2046>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가위 영화는 어떤 순서로 보면 좋을까요?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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