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드라마 멜로가체질은 왜 오래 남을까요?

개봉작을 고르려고 작품 목록을 넘기다가도, 가끔은 예전에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제게는 친구들이 별일 아닌 듯 대화를 주고받는 <멜로가 체질>의 순간들이 그렇습니다. 큰 사건보다 누군가의 말투와 잠깐의 침묵이 오래 남는 작품이죠. ‘인생드라마 멜로가체질’이라는 말을 듣고 보기 시작한다면, 어떤 이야기이고 무엇을 기대하면 좋을지 먼저 알고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세 친구의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될까요?
JTBC에서 2019년 8월부터 9월까지 방송한 16부작 드라마입니다. 중심에는 서른 살 친구 세 명이 있습니다. 천우희가 연기한 임진주는 드라마 작가, 전여빈이 연기한 이은정은 다큐멘터리 감독, 한지은이 연기한 황한주는 드라마 마케팅 일을 하는 워킹맘입니다. 세 사람은 한 공간에서 일상을 나누지만 각자 감당하는 문제는 꽤 다릅니다.
진주는 원고를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손범수 감독과 부딪힙니다. 은정은 일과 관계에서 얻은 상처를 안고 하루를 보냅니다. 한주는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서도 제 몫을 해내야 하죠. 직업만 놓고 보면 방송 업계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퇴근 후에도 끝나지 않는 마음의 일에 더 가까운 드라마입니다.
로맨스를 기대했다면 어떤 점이 다를까요?
제목에 ‘멜로’가 들어가고 진주와 범수의 관계도 중요한 축입니다. 다만 한 커플의 연애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은 아닙니다. 오래된 관계를 떠올리는 사람, 새로운 감정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 당장 아이의 하루를 챙겨야 하는 사람이 번갈아 화면을 차지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설레는 장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감각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관람 전에 기대치를 조금 조절하면 좋습니다. 빠른 전개와 뚜렷한 사건 해결을 좋아한다면 초반의 긴 대화가 느리게 들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물들이 농담 한마디로 어색함을 넘기거나,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장면을 즐긴다면 금방 리듬을 탈 만합니다. 영화 한 편처럼 단숨에 큰 감정을 터뜨리기보다 16회 동안 관계의 온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쪽입니다.
웃기다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
연출과 극본에 참여한 이병헌 감독의 대사는 빠르고 재치 있습니다. 진지하게 시작한 대화가 엉뚱한 곳으로 새고, 무심한 농담이 뜻밖에 상대의 마음을 짚기도 합니다. 방송 일을 하는 인물이 많아서 대본, 촬영, 홍보를 둘러싼 상황 자체가 웃음을 만드는 순간도 있습니다. 업계 용어를 모두 알아야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가벼운 코미디로만 생각하면 은정의 장면에서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실과 애도가 이야기의 한 축이고, 인물마다 아픈 일을 견디는 속도도 다르게 그려집니다. 웃긴 장면 뒤에 곧바로 조용한 장면이 이어지는 편이라, 마음이 지친 날에는 예상보다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연을 미리 알 필요는 없지만 밝은 로맨틱 코미디만 기대하고 재생하지는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인생드라마라는 평가는 어디서 나올까요?
‘인생드라마’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맞는 평가일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이 특히 가까워지는 순간은 인물들의 삶이 잘 풀려서가 아니라, 잘 풀리지 않는 상태로도 밥을 먹고 출근하고 친구와 이야기를 이어 갈 때입니다. 진주의 일과 연애, 은정의 애도, 한주의 육아와 직장 생활 가운데 하나라도 지금의 생활과 겹치면 평범한 대사도 다르게 들립니다.
세 친구가 늘 서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농담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가까운 사이여서 오히려 말을 고르기도 합니다. 그 거리감 덕분에 우정이 지나치게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습니다. 조연들의 관계 역시 주인공에게 답을 알려 주는 장치로만 쓰이지 않아, 한 사람의 선택을 곧바로 옳고 그름으로 나누기 어렵습니다.
저라면 이 드라마를 처음 볼 사람에게 ‘몇 회부터 재미있다’는 약속보다 대사의 속도와 인물들의 생활을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세 친구 중 누구의 하루가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지 보면서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그때는 지나쳤던 사람의 마음이 눈에 들어오는 작품, <멜로가 체질>은 제게 그런 드라마로 남아 있습니다.
